[유우지] 패션 (PASSION)

 

 

출처 : 리디북스

(소설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적는 공간이기에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작품명 | 패션 (PASSION)

작가명 | 유우지

초독일 | 2020년 11월 01일

완독일 | 2020년 11월 23일

 

 

워낙에 유명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쉽게 시작할 수 없었던 이유는 상당히 구작이기 때문이었다.

2006년 작품이기에 현재와는 너무나도 다른 시대 상황이고.. 그런 부분이 분명히 나에게는 크나큰 몰입 방해 요소이기 때문에 섣불리 구매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읽을 것이라는 생각에(분명 언젠가는 읽을 것이라 확신했다.) 각종 사이트에서 다른 작품을 서치 하는 도중 심심찮게 올라오는 관련 내용들에 스포 당하지 않기 위해서 애썼던 기억도 난다.

그러던 중 개인적으로 바쁜 일이 있어 한동안 소설을 읽지 못했던 때. 그 일이 해소된 즉시 리디북스에 접속하여 1권을 구매해버렸다.

항상 새 책을 읽기 전엔 긴장되어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그 두근거림을 안고 시작한 첫날은 15페이지 남짓 읽다가 침대에서 곯아떨어져버렸고... 둘째 날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님의 신작이(구작이지만 e-book으로 이번에 출간된) 출간되어 그 소설을 먼저 읽게 되어 또 뒷전으로 밀려났지- 그리고 드디어 제대로 읽게 된 패션.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인 내가 적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1일 1권씩 총 6일 만에 완독 한 작품.

 

 

 

[일레이의 손을 보고, 고서 중개상인 줄 알았던 일레이와 미치광이 리그로우가 동일인임을 알게 된 태의]

 

태의가 UNHRDO 아시아 지부에 도착 후 숙부의 방에서 우연히 일레이의 전화를 받게 되는 부분.

 

하얀 손이었다. 섬세하고 고운 손은, 피아노 건반 위를 달리는 게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큼직한 머그컵이 그 손에 들어가니 무척 작아 보일 정도로 커다란 손이었지만, 투명하리만치 하얗고 아름다운 손이다. 손가락 끝마다 가지런히 달려 있는 손톱도 창백한 유리 같았다.

- 패션 (PASSION) 1권 중 -

 

그리고 야간 행군 중 동굴 앞에서 리그로우가 태의의 피를 닦는 용도로 사용할 장갑을 벗어주는 장면.

 

피가 묻어나는 장갑을 들고 있는 그의 맨손이 몹시 하얗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하늘 아래로 부옇게 흐린 달빛을 받아, 그 손이 유난히 창백했다.
유리처럼 가지런하게 반짝이는 손톱.  길고 섬세한 손가락. 희고 아름다운 손.
낯익은 손이었다. 얼마나 낯이 익었는지, 정태의 자신의 손보다 더 익숙하게 보였을 정도다.

- 패션 (PASSION) 1권 중 -

 

 

패션 세계관에서 일레이의 손을 이리도 아름답게 묘사하는 사람은 아마 정태의 뿐일 거다. 숙부의 말마따나 '무서운 손'이라면 몰라도 '예쁜 손'이라는 소리는 생전 들어본 적 없을 것이다.

그리고 태의의 그 생각은 일레이가 리그로우라는 사실을 안 뒤에도 변함없다.

그 부분이 참 정태의답다고 생각하는 부분. 작품을 읽다 보면 태의의 성격이 참 담백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인정할 것은 빨리 인정하고, 수용력 또한 높지만, 자신의 생각은 나름 확고한. 줏대 있는 스타일이라 참 마음에 들었다.

 

태의가 뒤통수 제대로 맞았음을 잘 보여주는 장면. 하지만 두 장면 모두 글을 읽으면서 태의의 묘사에 따라 나 역시 일레이의 길고 흰 손가락을 머릿속으로 그려나가게 되어서 참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이름, 그리고 두 사람]

 

이 둘은 이름을 자신의 입으로, 혹은 타인의 입으로 통성명하는 일이 꽤나 있었다.

 

'그런데 독일은 어디야? 넌 독일에 있어? 그럼 여기에 못 와? 미국보다 멀어? 나 지금 심심한데, 놀러 오지. 나는 태의라고하거든. 정태의.'

- 패션 (PASSION) 2권 중 -

 

'그래, 그렇다면 둘째 조카겠군. 이름이......?'
"......정태의. 그쪽은?"
'일레이.'

- 패션 (PASSION) 1권 중 -

 

이렇게 보니 아주 평범하고, 선입견만 없었더라면 상당히 호감 가는 인상의 매력적인 청년으로 못 볼 것도 없었다.
"리그로우......, 맞지?"
정태의는 망설이다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약간 놀란 듯하더니 픽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맞아. 우리 지부에서 그 이름을 가진 건 나뿐이지. 어디선가 나에 대한 말을 들은 모양이지?"

- 패션 (PASSION) 1권 중 -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안 들은 것 같군."
리그로우가 흘리듯이 중얼거리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정태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뚝 떨어졌다.
(중략)
"정태의. 너는 탄창도 비어 있는 총으로 대체 뭘 어쩌려고 했어."
숙부가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리그로우가 정태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새기듯이 중얼거렸다.
"태의, 정태의란 말이지."
요 근래 들어보지 못했던 정확한 발음이었다.

- 패션 (PASSION) 1권 중 -

 

"어느 게 성이고 어느 게 이름이야."
"리그로우가 성."
"그렇군....... 어느 걸로 불리는 게 좋아."
"네가 편한 대로."
"그래. 그런데 어느 쪽이든 별로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일레이 리그로우."

- 패션 (PASSION) 1권 중 -

 

첫 번째 장면에서 저 뒷부분의 내용을 보면, 태의는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일레이를 교육(?)만 하다가 일레이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어봐놓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려 일레이를 황당하게 만든다.(이에 화가 난 일레이는 전화기도 부숴 버렸다...)

만약 그때 태의가 일레이의 이름을 들었다면- 숙부의 방에서 자신과 통화하는 인물이 어릴 적 자신과 딱 한번 통화한 적 있는 '일레이'라는 이름의 독일인임을 과연 기억해낼 수 있었을까?

(일레이는 확실하게 기억하지만 말이다-)

 

나는 이 둘의 이름과 그에 연관된 여러 서사들을 좋아하는데, 통성명하는 장면과 함께 굉장히 좋아하는 서사 중 하나가 바로 '서로의 이름을 온전히 부르는 존재가 서로'라는 것이다.

 

"일레이. 또 그랬구나."
친구는 소년을 보고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일레이라고 불린 그 소년은 얼굴에 튄 핏방울을 닦아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러니까 왜 멋대로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래."
"이름은 부르라고 있는 거야."
"성으로 부르라고 난 분명히 말했다고. 내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건 내가 허락한 사람뿐이야."

- 패션 (PASSION) 2권 중 -

 

이 장면을 비롯한 많은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일레이는 자신이 허락한 사람 외에는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가족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름이 아닌 '성'으로. '리그로우'라고 부른다.

그런 일레이가 숙부의 방에서 전화를 받은 정태의에게 알려준 이름은 '일레이'

(이쯤 되어서 드는 생각은 만약 어릴 적 태의와 처음 통화한 날, 태의가 전화를 끊지 않았더라면 일레이는 자신의 이름을 뭐라고 알려줬을까?

아마 그 당시의 일레이는 '리그로우'라고 알려주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먼 훗날 태의와 다시 통화하게 된 그날 역시 일레이가 아닌 리그로우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을지. 아니면 일레이라는 이름으로 말해, 자신을 옛날의 리그로우와의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굴었을지-)

그렇기에 일레이를 '일레이'로 부르는 사람은 적어도 UNHRDO 내에서는 정태의 뿐이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태의 역시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 때문에 다국적의 인종이 모여있는 UNHRDO에서는 '정태의'가 아닌 '태이'로 불린다.

일레이 역시 발음하기 편한 대로 종종 태이라고 부르는 편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태의의 이름을 발음하지 못해서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

 

정태의.
나는 그 녀석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녀석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 패션 (PASSION) 4권 중 -

 

4권. 일레이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hidden track의 한 구절.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다. 저 길지 않은 문장만으로도, 일레이도 완전히 알아채지 못한 일레이의 마음이 보이는 부분이라서-

나는 저 문장이 어딘가 쓸쓸하다고 느껴진다. 씁쓸하달까, 쓸쓸하달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처음에 태이라고 발음 편한 대로 불러서 애초에 그렇게 인식한 건지도 모른다. 가끔 옳은 발음으로 불러 줬지만 그 녀석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상관없었다. 나는 가끔 그의 이름을 똑바로 부르고는 그 녀석이 알아채지도 못하고 '어, 왜.'라고 대답하는 걸 보면서 홀로 웃었다.

- 패션 (PASSION) 4권 중 -

 

하지만 일레이는 상관없다고 한다. 그런 태의를 보며 홀로 웃었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저렇게 생각하는 일레이 역시 사실은 태이가 눈치채 주길 바라지는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 한편에 남는다.

'너'의 온전한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나'를.

무던한 태이의 모습에 웃으면서도, 한 번쯤은 일레이 역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신을 불러주는 '나'를 알아봐 주길 기대해보지 않았을까-

 

'태이, 대답하라니까! ... ⏤제길. 너 몸은 멀쩡한 거지. 네 멋대로 다치기라도 했으면 죽을 줄 알아라....... 대답 좀 해! 태이, 정태이! ......정태의!'
아, 또다. 이놈은 가끔씩 발음이 좋아지더라....... 누구한테 발음 교정 개인 교습이라도 받았나.

- 패션 (PASSION) 6권 중 -

 

"정태의. …⏤너, 나 좋아하지."
다시금 선명한 발음으로⏤가끔 발음이 퍽 분명할 때가 있었다. 이놈이 아무래도 몰래 발음 연습이라도 했나 보다⏤이름을 부른 일레이는, 잠시 사이를 둔 뒤에 그렇게 말을 이었다.

- 패션 (PASSION) 6권 중 -

 

하지만 태의는 알고 있었다. 워낙 무던한 성격이라 일레이가 자신을 제대로 부르는 것에 대해 크게 반응하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의식하고 있었다. 이 부분 역시 굉장히 좋았다. 작 중 태의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기 때문.

어떤 일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크게 고민하지 않고, 쉽게 받아들이는. 정태의 특유의 담백한 성격.

그렇다고 해서 타인이나 자신에게 아주 무신경하지는 않은. 그런 태의의 성격은, 일레이의 부름에 '이번에는 발음이 퍽 좋네-' 정도의 생각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대체적으로 소설을 읽을 때 수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인데, 이런 성격 때문에 정태의는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설 내용 자체가 전체적으로 가볍지 않고, 사건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반해 태의의 이런 성격 덕분에 읽는 데 있어서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워낙 긍정적이고 결단력이 있어서(포기도 빨라서) 심각해질 것 같다가도 어느 쪽으로든 그 사건이나 고민이 길어지지 않는 점이 참 좋았다.

 

 

 

[중요한 매개체인 전화]

 

둘은 유난히도 통화하는 장면이 많다. 그리고 전화라는 매개체는 이 둘에게 있어 꽤나 큰 역할을 하는 대상이다.

일단 둘의 첫 대화가 어릴 적 나눴던 통화인 것만 봐도 그렇고,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둘이 처음으로 나눈 대화 역시 통화.

그리고,

 

'너무한데. 태이. 나는 지금 말이야, 그렇게 고생을 한 너를 위해 한 가지 조언을 해 주려고 하는 참이란 말이지. 너를 위해 아주 중요한.'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아주 중요한, 에서 나직하게 낮추어지는 그 목소리가 마치 정말로 귓가에서 들려온 것 같았다.
"그것 궁금하군. 뭔데."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물었다. 그러자 일레는 이를 갈듯이, 새카만 어둠 속에서 배어 나오는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속삭였다.
'잡히지 마라.'

- 패션 (PASSION) 4권 중 -

 

일레이에게서 도망친 이후, 태의와 일레이의 첫 대화 역시 숙부에게 건 전화를 우연히 대신 받게 된 일레이와의 통화이고,

 

정태의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초조해졌다. 언제 누가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는 다른 초조였다. 갑작스레 치밀어 오른 그 기묘한 감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빈다.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다. 확인할 것도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뭔가 물어볼 게 있었다. 물어보는 게 두렵기도 하고, 만일 예상하는 대답을 들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고심하기도 했었다.
그게 뭐였지. 그 말은.
(중략)
멍하니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던 정태의는, 귀를 간질이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불쑥,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며, 말해 버렸다.
"야. 나 혹시 너 좋아하는 거 아닐까."

- 패션 (PASSION) 6권 중 -

 

갑자기 생각났다. 이 남자에게 해야 했던 말. 확인했어야 할 것.
정태의는 잠시 머뭇거렸다. 가능하면 직접 만나서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얼굴이 어떻게 바뀌는지 보고 싶었는데. ......아니 어쩌면, 직접 대놓고 물었다간 당장 괴물처럼 이를 드러낼지도 모르니까 멀찍이 떨어졌을 때 전화로 묻는 게 더 현명한 건지도 모르지. ......아냐, 하지만 전화로 말하기는 좀.......
그러나 그 망설임은, 정태의가 안간힘을 쓰며 버티던 화장실 문이 세 남자의 힘에 의해 활짝 열리고 만 순간, 일순간에 치밀어 오른 다급함으로 날아가 버렸다.
"일레이, 너, ......너 혹시 나 좋아하냐."

- 패션 (PASSION) 6권 중 -

 

태의가 라만의 별저에 감금당했을 당시, 두들겨 맞을 각오를 하고서 간신히 훔친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일레이였다.

그 통화는 본래 자신의 생사와 자신이 도망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납치된 장소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였을 테지만,

태의가 전화를 통해 일레이에게 건넨 말은 다름 아닌 자신 안에 줄곧 존재하던 궁금증에 대한 질문.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해야만 하는 물음을 일레이에게 질문의 형태로 건네었지만, 이는 동시에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한 그 말.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정태의식의 고백.(아마 본인은 고백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그리고 역시 자신에게 향하는 일레이의 감정에 대해 줄곧 혼자 생각만 해왔던 정태의가 처음으로 일레이에게 자신이 가진 이 의문에 대한 확답을 얻고자 했던,

이처럼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전화는 그저 사전상 의미 그대로의 '전화'만은 아니다. 이 둘의 시작이자, 싹튼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음으로써 보다 명확하게 서로의 감정을 '인식'하게 된 아주 중요한 수단이다.

 

 

 

[이외에 내가 좋아하는 장면들]

 

리그로우는 힘없이 늘어져 있는 자신의 손으로 멍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다가 하나, 둘, 손가락을 꼽으며 그 움직임을 쳐다보았다. 손이 어떻게 생겼나 탐구라도 하듯이.
'그놈이 이걸 마음에 들어했었거든. 나는 다시 봐도 왜인지 모르겠지만.'

- 패션 (PASSION) 4권 중 -

 

태의가 떠난 후 우연찮게 일레이의 방을 방문한 정창인에 의해 결박당했던 손목이 풀리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자신의 손을 좋아했던 태의를 곱씹어보는 혼잣말.

아마 그때 일레이는 약에 취해 혼몽한 상태였지만, 그 혼몽한 의식 속에서도 어렴풋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늦었다.'라고.

정태의는 이미 떠나버렸고, 자신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자신의 감정이 기우는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의 옆에 없다는 것을. 아주. 아주 어렴풋이.

 

그 이후 일레이는 태의의 꿈을 꾼다. 시각, 청각, 촉각이 선명한 현실과도 같은 꿈. 그러나 곧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 일레이는 생각한다. '내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빼앗긴 기분'이라고.

태의가 도주한 날 일레이는 '정태의가 내 손 밖으로 떠난다는 것'과 '그가 나를 끔찍하게 싫어했다는 것' 이 두 가지의 사실만을 기억하고, 그것에 분노한다. 일레이의 말에 의하면 이토록 화난 적이 없었다고 하며, 정태의를 찾아내어 죽여버려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감정은 꿈에서도 그대로 표출되어 꿈속에서 일레이는 결국 태의를 죽이고 만다.

그렇게 죽이고 싶었던 상대를 꿈속에서나마 죽인 일레이가 꿈을 깨고 느낀 감정은, 보통의 그였다면 죽이려고 한 대상을 죽인 것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맹렬히 분노하였겠지만,

꿈에서 깬 일레이가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은 다름 아닌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일레이.'

그리고 그는 그 분노에 대해 잊어버린다. 분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를 다시 내 손으로 끌어와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를 두 번 잃게 될 터였다.
그것만이 지금의 내겐 중요한 사실이었다.

- 패션 (PASSION) 4권 중 -

 

일레이가 태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부분.

본인이 정태의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어라 부르는 것인지는 아마 이때의 일레이는 정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하나. '정태의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만이 사실이고, 그것만이 자신의 전부였다.

 

"그때, 네가 전화했을 때."
문득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가 그랬잖아, 날 좋아한다고."
그 단호한 맺음에 정태의는 까마득한 머리로 기억을 억지로 되새겨보았다. 그러나 단언할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한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 말을 그렇게 들었던 걸까.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 그때 분명하게 생각했어. 이건 내 거다."
"......"
"그리고 전화를 끊기 직전에 네가 나더러, 널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깜빡, 깜빡, 수면과 현실의 경계선 사이를 넘나들며 천천히 현실 저 너머로 의식을 떨어뜨리려 할 즈음, 문득 나직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린 것 같았다.
"그렇더라도 역시......내 거지."

- 패션 (PASSION) 6권 중 -

 

일레이가 정태의에게 대놓고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다지도 일레이다운 고백이라니-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저 상황에서는 문맥에도 맞지 않는 말이지만, 정태의에 대한 일레이의 애착, 감정이 응축되어 짧은 한 단어로 표현할 말이 '내 거' 외에 달리 무엇이 있을까.

그렇기에 이 장면 역시 정말 좋아하는 부분. 일레이다운 마지막 말에 혼자 피식 웃으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

처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흡입력 있게 빠져들어 읽었던 작품.

워낙에 유명한 '일태의' 커플을 이제서라도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내용 자체의 무거움 때문에 아마 재독은 어렵지 싶다.

시간이 한참 흘러 혹시라도 다시 읽을 날이 온다면 또 다른 느낌이 들겠지.

책을 굉장히 곱씹어서 천천히 읽는 편인데도, 내용을 금방 잊어버리는 탓에 독서할 당시의 내 감정과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온전히 기억하고 싶어 내 개인적인 생각이 가득한 감상을 작성해봤다.

앞으로도 종종 기록으로 남길 생각.

원래는 본편만 읽고 패션의 다른 시리즈는 읽을 생각이 없었는데 일태의 더 보고 싶어서라도 나중에 적어도 스위트는 꼭 읽어봐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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